20세기 초기에 세계사의 특징으로 나타난 것은 유럽의 민족주의 였으며 그것은 곧 유럽에서는 파시즘이나 나치즘의 성격으로 나타났고, 또한 공산주의나 일본의 군국주의 등으로 표출되었다. 당시의 교회들은 이데올로기 교육으로 기독교의 실체를 위협받았으며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큰 손실을 만들었다. 그 당시의 큰 반환점에서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가공할 만한 사건은 독일의 고백교회가 취한 기독교 진리 운동이었다.
1933년 11월 27일 전체주의 하에서의 신학에 반대하여 10%정도의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제국주의 감독으로 선출된 루드빅 뭘러(Ludwing Muler)의 나치지원을 받는 교회에 반대하여 참교회를 위하여 조성되었다. 또한 마르틴 니뭘러(Martn Nienoler)가 조직한 '목사 비상 동맹회'와 자유고백 종교회의들 같은 움직임에서 생성되었다. 그러나 고백교회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고백교회가 전제주의하에 예속되어 있는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반대표명했다. 또한 참교회를 선포하고 억압받게되자 고백교회는 비밀리에 투쟁했으며, 나라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시대의 복음을 위하여 그 시대이 위험을 짐어지고 나아갔다.
고백교회 운동은 역사상 큰의미를 소유하고 있다. 첫번째로는 세계의 역사상 전제주의 하에서 공식적으로 복음을 선포함이고, 두번째로는 이때의 신학 사상이 20세기의 신학에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칼 바르트와 본 회퍼의 시대를 알아보고, 또 시대적 요구 속에서 행한일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큰 흐름속에서 새로운 반환점에 서있는 현대 기독교에 대한 진리운동의 방향을 바라보고자 한다.
1. 고백교회의 신학적 기초
당시 교회들은 신학적 근거가 요구되므로 나치즘에 동조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빨리 파악한 이는 칼 바르트와 본 회퍼, 니뮐러, 헤겔, 니젤등이었다. 당시 필요한 신학은 근거가 요구되므로 그들은 신학적인 기초를 표명하여 교회를 파괴하는 나치당의 해독제 역할을 했다.
고백교회의 신학적 입장은 1934년 5월 31일 부페탈의 바르멘에서 작성되어 바르멘 선언에 천명되어 있다. 이 선언문은 칼 바르트와 본 회퍼의 계열을 따르는 사람들이 전제주의 하에서 기독교의 바른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바르멘 신앙 고백 문서
독일 나치 기독단으 오류와 교회를 파괴하고 독일 개신교회의 일치를 산산조각내는 제국교회의 지배에 직면하여 우리는 아래와 같은 복음적 진리를 고백한다.
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수 없다."(요 14:6)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 오면 구원을 얻는다,"(요 10:10) 성서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귀 기울려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이고, 살든지 죽든지 그것만을 신뢰하고 그것에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가 자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 다른 출처들, 다시 말하면 신적 제시를 위하여 다른 사건들, 다른 능력들, 다른 인격들과 다른 진리들로 부터 끌어내어 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에 덨붙이고 그 말씀 옆에서 취한 교리들을 거부한다.
다른 다섯 조항에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2. 그리스도의 모든 삶이 그의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은 영적인 이분법과 성과 속사이의 거짓된 분리를 거부한다.
3. 이 세상의 모든 소송들과 교리들에 비하여 그의 유일한 규율에 속해 있는 자유
4.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평등성인 만인 제직과 교회에 적용된 '지도자 원리'의 거부
5. 국가 법률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설.
6. 온 백성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모든 이데올로기들과 선전들에 관한 그의 메세지의 자주성
이 문서는 독일의 모든 그리스도 인들에게 고백교회에 가담 하라고 촉구하는 말로써 끝맺음을 하고있다. 이 문서는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살과 죽음에 있어서 복종해야 된다고성경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다는 것을 강조하고 국가에 예속되는 기독교를 거부한다.
죄를 깨닫고 실수를 인정하고 거짓을 거부하는 것은 진리적인 교회를 스스로 설수있게 하는 신학적인 기초가 된다. 독일 고백교회는 내적인 갈등과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갔으며, 또한 이 바르멘 선언은 고백교회의 신학적인 기초가 되었다.
고백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었는지 정확하게 나온 자료는 없지만 바르멘 선언의 신학를 기초하여 진정한 기초를 세웠다. 고백교회의 신학적 기초는 독일 루터 교회안에서 일어난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수세기동안 이루어져왔던 루터교회의 전통을 포기해야만 하는 어려움 또한 있었다.
2. 시대적 요구와 바르멘 선언
20세기 전반의 유럽의 민족주의는 공통으로 전제주의를 잉태 시켰고 러시아의 레닌주의, 이태리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주의, 중국의 모택동주의로 나타났다.
유럽은 19세기에 낙관적인 철학과 신학의 요람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아래 인류가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리라고 자신하였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이 식민지 점령이야 말로 세계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 주는 이타적 작업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카톨릭 진명보다 더욱 더 깊이 이러한 환상에 젖어 있었다. 왜냐하면 19세기 카톨릭은 현대세계를 통틀어 정조 했는데 반해,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는 실질적인 이러한 새로운 사상에 굴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해 이러한 19세기의 꿈이 산산 조각 났을 때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는 기초부터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신학과 윤리학의 이원론적 분리현상의 산물인것이다. 19세기 카톨릭교가 창조적으로 현대 세계의 도전들을 대응하지 못한 결과 프랑스에서는 회의주의와 세속주의가 창궐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자유주의와 난관주의적 희망의 실패로 말미암아 독일, 스칸디나비나, 영국 등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득세했던 지역에서도 회의주의와 세속주의의 세력이 득세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독일에서는 히틀러와 나치당이 세력을 더해 갔으며 1930년 바티칸과 나치 제3국은 회의를 조인 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도전에 비판적으로 대응할 신학적 도구들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실제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인간들을 완전하게 될수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히틀러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작업이라고 까지 찬양하였다. 또한 이들은 복음과 독일 문화를 혼돈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독일이야 말로 전세계를 문명화 할 사명을 지니고 있는 국가라는 나치들의 주장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통일 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를 통해 독일 민족주의를 한데 합친 "독일 기독교당"이 출현하였다. 이들의 의도들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창치되는 개념으로 제 해석하여 당시 독일제국의 반유대정책에 공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시책에 부응하여 1933년에는 연합 독일 복음주의교회가 결성되었다. 그래서 이를 영도하던 감독이 자신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자 히틀러는 파면시켜 버리고 다른 인물로 대체하였다.
이 시대의 전체적인 흐름이 주어질때에 칼바르트의 저술들은 당시의 도전들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었다. 시대적 요구는 바로 1916년 바르트는 투루나이젠과의 대화를 통해 드디어 신학을 전혀 새로운 기반위에서 시작해야 할 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이 작업을 위한 최신의 방법은 성경본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오므로 개혁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개혁 종교회의는 1934년 개혁교회 교인들은 고백교회 내에서 아주 강한 그룹이었다. 충분히 두드러진 대변자인 헤르만이다. 이들이 칼바르트를 중심으로하여 신학적 정립을 하고 독일교회에 반대표명하였다. 종교회의에 내놓자 독일교회 167개의 교회들에게 발표되는 것이 허락되었다. 각각의 교회는 종교회의에의해 선포되었고 바르멘에서 선포되었다. 결국, 이 선언문이야말로 복음의 이름으로 히틀러의 정책들에 대항하였던 '고백교회'의 기본적 입장이 되었다. 이 신학은 전세계를 뒤흔들 만큼 그 시대에 필요한 신학이었다.
히틀러의 정권아래 가장 많이 박해를 받고 순교한 본 회퍼는 이 시대를 볼 때에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13세기 이후부터 그리스도와 윤리와의 분리가 가중화 되므로 현시대는 그리스도와 윤리가 이원론적으로 나뉘어 있는 상태의 산물이라고 했다. 독일에 대하여는 "애국과 진리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라고 했다. 바르트는 히틀러를 새로운 구원자로 여길정도의 모습을 보고 당시의 일을 심각하게 여겼다. "진정한 문제는 독일의 교회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개혁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 시대를 볼 때 사회 중의 미래교회를 남겨둘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큰 문제를 알았다.
3. 고백 신앙
당시 시대의 요청이 무엇인가 알고 행동한 사람들중에 대표적 인물은 칼 바르트와 디트리트 본 회퍼와 고백교회 일원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33년 아돌프 히들러는 독일 총통에 선출되었고, 교회는 처음으로 국가 감독을 겪었다. 그후 독일의 기독자 노선이 엇갈렸다. 하나는 국가 감독 체제에 응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교회에 관한 국가감독의 손은 신학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4년 루드빅 니뮐러가 교회의 국가 감독의 통치자가 되던날 바르트는 교수로서 해고가 되었다. 분명히 그의 해고는 히틀러에 대한 경배로 권세잡은 자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이러한 일은 바르트 뿐만 아니라 히를러에 대한 경배를 따르지 아니하는 기독인들에게 있었다. 그때마다, 신앙고백은 줄을 지었고 독일의 교회에 관하여 가슴아파했다.
바르트는 그 이후에도 국가감독 조약에 동의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다. 그때, 신학자인 칼 바르트에 의한 조약에 바르트는 이교도들이 하는 것으로 인정했고 바르트가 칼 페르츠에게 폭탄처럼 말을 했다. "우리는 다른 믿음과 다른 하나님을 찾고 있다." 이 폭탄적인 선언으로 인하여 페르츠는 창백해졌다. 그 자리에 고가르텐이 있었는데 그는 놀라면서 "넌 미친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바르트가 돌아오기를 원했다. 그는 정말 정직한 사람이다. 이는 그와 독일의 크리스찬 사이에 상이한 차이점 이었다. 그후 바르트는 독일에서 추방되었으나 세계여러나라를 다니며 세계적인 인물들과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의 신학에 대학연구와 독일교회에 대한 외침은 계속되었다.
메이져 주교는 9달 동안 말하고 독일의 교회에서 원했다. "복음교회의 마지막 이다."라고 말하고는 독일교회에 대해서 울었다. 바르트는 공식적이고 강력하게 독일의 크리스찬이 활동하도록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인들이 낮추어 놓은 만큼 강조되어 울려야한다고 생각했다. "독일교회는 거짓되고 핵심에서부터 썪었다. 이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찬성할 수 있고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거짓되어 있고 잘못된 것을 막을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완전하게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단지 사랑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의 연설문 중에서 "여러분, 이제 누구에게 복종해야하는가를 결정해야합니다! 내가 국가의 보이는 지도자에게 속하는가 아니면 여러분이 끊임없이 말하는 상상의 주께 속하는가를 말입니다."이것은 그 시대의 영적인 문제를 알았기 때문이다.
본 회퍼는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을 때 고백교회는 그에게 독일로 돌아와 지하신학교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영국에 있던 그의 친구들은 이 요청을 거부하도록 충고했지만, 그는 독일로 돌아왔다.
1937년 [제자도의 대가]를 출판했는데, 그 내용은 산상보훈을 당시의 상황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같은해 그가 이끌던 신학교는 나치 정권의 명령으로 해체되었다. 이러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모아 신학교을 했다. 1939년 성도의 공동체을 위험속에서의 생활경험을 토대로 출판했다. 런던에 잠깐 들렀을 때 친구들은 독일로 돌아가지 말라고 강권했지만, 그는 다시 귀국했다. 미국에 갔다가 다시 독일로 돌아올 때 말했다. "나는 애국과 진리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안전한 상황 속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수는 없다." 독일내의 생활은 갈수록 험난하여졌다. 그의 신학교가 비밀 경찰에 의해 폐쇄되었으며, 그의 저술의 출판이나 공개 강연을 금지 당했다. 그 후 3년 동안 히틀러에게 대항한 그의 지하 저항은 점차 증가되었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평화주의자 였다. 그가 히틀러의 암살을 계획하는 급진세력에 어쩔 수 없이 가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들에게 어려운 정치적, 실질적 결정들을 떠맡기는 이러한 평화주의야 말로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스웨덴에서 만난 자기의 친구에게 자기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일원이라고 털어놓았다. 히틀러의 암살 계획은 실패하고 나치정권에게 투옥되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많은 문서들을 썼지만, 당국에 의하여 몰수되거나 삭제되었다. 그의 남은 문서는일부 그를 존경하는 간수들의 손을 통해 비밀리에 유출되어 몇몇 문서들만 남아있다. 그는 옥중에서도 간수들과 동료 죄수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들의 목회자가 되었다. 나치가 가장 싫어했던 본 회퍼는 명목상 군사 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히들러 정권이 무너지기 직전 사형을 당했다. 또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청년들이 순교 당했다.
위에서 살펴보듯이 바르멘선언을 기초로한 신앙을 바탕으로 모여진, 고백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성경적 견해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기독교의 모습을 태동시켰다. 정통 보수주의자들이 동의 할수 없는 많은 일들이 바르트와 본 회퍼를 비롯한 목사비동맹회 등이 함께하는 고백교회의 신학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인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독일의 전제주의의 모태는 이데올로기 사상에서 나오며, 이데올로기 사상의 모태는 인본주의이며, 인본주의의 모태는 13세기의 르네상스 사상이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있었던 본 회퍼가 잠옥에서 씨름하였던 과제가 곧 현대 사회의 문제점으로 등장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이 시대가 성숙단계에 있읕며,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현명한 부모와 비슷한 것으로서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간다고 묘사하였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와 현대, 세속화한 현대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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